한국 S사에서 부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그룹장이었던 임원이 회의에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놨다. 그 임원은 그룹원들과 정기적으로 일대일 면담을 갖곤 했다. 그는 어느 날 면담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중요성과 파급효과를 강조했다고 한다. 팀원들에게 소속감과 자부심을 심어주고자 하는 의도였다. 그런데 면담에서 한 팀원이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졌다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회사가 잘 되는 것은 알겠는데요, 저한테 좋은 것은 뭔가요?”
애사심이 부족한 팀원의 당돌한 도전으로 치부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팀원을 동기부여할 방법을 고민하는 계기로 받아들이고, 그 자리에 배석한 다른 부장들에게 각자의 대답을 물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뾰족한 해답은 없었다. ‘열심히 일해서 성과를 내면 빠른 진급과 높은 연봉의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뻔한 대답이 전부였다. 회사에서 중간관리자의 직책을 맡고 있는 우리였지만, 어쩌면 각자의 마음 속에도 저 팀원이 던졌다는 질문이 늘 도사리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맡는 프로젝트는 내가 정한다
미국으로 온지 4년이 지나 어느 정도 이곳에 적응한 지금도 일 욕심은 그다지 줄지 않았다. 정시 퇴근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아이들이 잠들면 다시 집 책상에 앉아 코딩을 이어가곤 한다. 나 뿐만이 아니다. 늦은 밤 사내 메신저에 접속하면 몇몇 동료들이 그 시간에도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동료들의 이름 옆에 환하게 켜진 불을 보면 참 많은 생각이 든다. 누가 시킨 것도, 스케줄에 쫓기는 것도 아닌데 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몰입하게 하는가. 분명한 것은 보상에 대한 기대심리 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곳에서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과정은 대부분 이랬다. 누군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그는 그 즉시 동료들과 그 아이디어를 공유한다. 몇 번의 내부 토의를 거쳐 아이디어는 다듬어져 비로소 프로젝트로 탄생한다. 프로젝트의 주체자는 곧바로 사업부 엔지니어들과 회의를 잡고, 아이디어가 상용화 가능한지 검증 받는다. 매니저는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파악하고 운영 상 도움을 줄 뿐, 기술적인 사항은 실무자들이 직접 결정한다.
프로젝트가 위에서 하달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구조다 보니, 다수의 프로젝트에 소속되는 경우도 많다. 내가 있는 R&D 부서의 경우 연구원들이 적게는 1-2개, 욕심이 있는 친구들은 4-5개의 프로젝트에 소속돼있다.
동기부여의 원천, 자기 효능감
이렇듯 실리콘밸리의 ‘열심히’는 그 의미가 한국과 조금 다르다. 한국에서는 열심히 일한다는 것이 부지런하게 여러 업무를 해내는 것을 뜻한다면, 이곳 실리콘밸리에서 열심히 일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 할 일을 찾아서 한다는 것에 가깝다.
스스로 일하는 이곳 동료들의 마음을 잠시 엿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어느날 우리 팀 동료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우리 회사가 좋아. 경쟁사인 X사 연구팀이랑은 다르게 내가 한 연구가 우리 회사의 다양한 제품에 직접 반영될 수 있거든. 이것만 아니었다면 난 X사 갔을 거야.”
이 친구가 열심히 일하는 원천은 기술적 영향력이었다. 자신이 연구하고 개발한 기술이 제품을 통해 많은 이들의 삶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이 친구를 움직였던 것이다. 그는 지금도 자신이 경험하지 않았던 새로운 연구 주제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다.


옆 팀의 또 다른 동료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실제로 이직에 뜻이 없더라도 2년마다 이직 시장(job market)에 나가보곤 해. 내 몸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확인하면 내가 그동안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 수 있거든.” 이 친구의 동인은 자신의 성장이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돈’이라는 자본주의적 가치로 환산하며 경력 향상에 집중했고, 몇 년 뒤 FAANG(Facebook, Apple, Amazon, Netflix, Google)중의 한 회사로 이직을 했다.
이 둘의 공통점은 강력한 자기 확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각자가 열심히 일하는 원인은 달랐지만, 자신이 일정한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면 반드시 ‘자신이 원하는’ 결과로 돌아온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란 제품 기여를 통한 성취감, 늘어난 사내 영향력, 한층 향상된 자신의 경력과 연봉이 될 수도 있다.
자기 효능감, 반복적인 경험에서 비롯
이러한 자기확신은 ‘하면 된다’는 자기 암시와는 다르다. 이들의 확신은 직간접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본인이, 옆 자리의 팀원이, 나아가 자신이 소속한 팀과 조직이 회사를 변화시켰던 경험을 반복적으로 쌓아가며 자연스럽게 ‘나라면 할 수 있다’라는 의욕이 생겨나는 것이다. 직원들이 이러한 ‘자기 효능감(self-efficacy)’을 가질 때 동기부여는 높아지기 마련이다.
이같은 자기 효능감을 가진 이들이 함께 모여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제품으로 출시되어 사용자들에게 전파된다. 개인은 경력을 성장시키고 자신의 가치를 키운다. 이러한 선순환이 실리콘밸리의 세계관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한국 기업들 역시 직원들의 동기부여를 위해 수많은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을 잘 알고있다. 다양한 성과보상 시스템을 도입하고, 직원들의 의견을 듣고자 주기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는 등 조직문화를 개선하고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직원들의 내재된 욕구를 이끌어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직원들이 ‘자기 효능감’을 느끼는지 그 여부에 있다. 회사의 일이 개인의 경력 향상에 도움되도록 이끌어, 회사에서 보낸 시간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할 때 직원들의 의욕은 높아지기 마련이다.
‘힘들게 가르쳐 봐야 회사 나가면 그만’이라는 편협한 생각을 버리고, 직원들이 일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회사를 위한 일이라는 사고로 옮겨가야 한다. 회사의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것은 결국 동기부여가 잘된 직원들부터이기 때문이다.
모쪼록 그건 ‘실리콘밸리니까 가능한 이야기’라며 회의적인 태도를 갖지 않기를 바란다. 개인들도 회사가 ‘자기 효능감’을 주지 못한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회사는 개인의 미래를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빨리 인지하고, 현재 내가 하는 일이 내 경력에 어떻게 도움이 될지를 고민하는 것이 본인의 미래를 위한 길이다. 5년 뒤, 10년 뒤 개인 커리어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을 현재의 직무에서 채워나가면 된다. 커리어 목표지향적으로 사고를 전환하면 그렇게 궁금해하던 ‘회사에서 나한테 좋은 것’이 눈에 보일 것이다. 그것이 스스로 ‘자기 효능감’을 불러일으키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이원종
Intel Reasearch Scientist
삼성종합기술원에서 11년간 근무 후, 현재 미국 산타클라라 소재 인텔에서 Research Scientist로 4년째 그래픽스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삼성에서 재구성 가능 프로세서, GPU 개발에 참여했고, Ray Tracing H/W 팀을 이끌었다. 실리콘밸리에서의 경험담을 브런치에 연재 중이다. https://brunch.co.kr/@airt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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