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끔 ‘방송작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을 받는다. 내게 그런 질문을 하는 분들은 대개 학생이거나 사회 초년생이다. 급여도, 업무환경도 외부에 잘 노출되지 않으니 직업으로서의 방송작가가 궁금하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이들을 만나면 꼭 ‘방송작가 채용공고’를 보라고 권한다. 현시점 업계 정보를 가장 명확하게 볼 수 있는 것이 구인공고라고 생각해서다.
사실 방송작가만큼 현직이 구인공고를 자주 보는 직종도 드물다. 방송사는 통상 일 년에 두 번 봄과 가을에 개편을 하는데 이 시기가 되면 방송사에서 일하는 작가들은 아슬한 긴장감을 갖고 산다. 내가 소속된 프로그램이 폐지되거나 개편될 수 있기 때문에다. 순식간에 실업자가 될 것을 대비해 개편 시즌이면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구인구직 사이트를 즐겨찾기에 추가하는 작가들이 많다.
사실 개편 시즌이 아니어도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다. 화제성이나 시청률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방송사는 소위 ‘제작진 물갈이’(일부 혹은 전체 제작진을 하차시키고 새로운 제작진으로 프로그램을 재정비하는 일)’라는 걸 하는데, 말이 물갈이지 결국 퇴직의 다른 말이다. 운이 나쁘면 일을 시작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물갈이’를 당하기도 하는데, 이런 일을 겪게 되면 순식간에 생계가 막막해진다. 방송작가와 구직 사이트가 가까운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필자는 지난 2014년부터 방송작가로 살면서 총 4곳의 방송사에서 일했다. 여러 차례 이직을 하면서 내게도 구인구직 사이트를 자주 체크하는 습관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나중에는 방송사의 구인공고만 보고도 대략적인 노동환경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한 경지에 이르렀다.
방송사는 업무 조건이 천차만별인 대표적인 업계다.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주체도 방송사 본사에서부터 제작사까지 다양하고, 작가가 상근을 해야 하는 프로그램이 있는가 하면 비상근으로 일을 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몇 번의 이직 경험이 쌓이자 체가 곡식과 쭉정이를 거르듯 방송사 구인공고만 보고도 알짜배기인 프로그램과 아닌 프로그램을 대략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쭉정이’ 같은 프로그램의 구인공고에서 유독 반복해서 쓰이는 묘한 문구들이 있다. 오늘은 그 네 가지 표현에 관해 얘기해 보려 한다.
1. 탄력적 상근
방송작가 구인공고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다. 보는 분들은 생소하실 수 있겠다. 대체 ‘탄력적 상근’이 뭐지? 일단 사전을 찾아본다. 탄력적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상황에 따라 알맞게 대처하는 것’이다. 상근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날마다 일정한 시간에 출근하여 정해진 시간 동안 근무함’이다. 조합하자면 출근해서 정해진 시간 동안 근무하지만 가끔 탄력적으로 출퇴근을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 말 뒤에는 상당히 복잡한 방송가의 셈법이 녹아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방송작가 대다수는 프리랜서다. 프리랜서라 함은 회사에 상시 고용된 노동자가 아니라는 소리다. 프리랜서는 당연히 상근을 할 의무가 없다. 하지만 많은 방송사나 제작사에서는 프리랜서인 방송작가에게 상근을 요구한다. 상근을 시키기는 해야겠지만 고용 형태는 프리랜서이니 상근 두 글자만 적으면 이율배반적이다. 그러니 ‘탄력적 상근’같은 이질적인 단어가 탄생한다. 공손하게 묻고 싶다. 혹시 그러면 출근도 탄력적으로 시켜주실 건가요?
2. 밤샘 없습니다
지난 2016년 박근혜 정부의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김기춘 씨 메모가 이슈가 됐다.
그가 청와대 직원들에게 불타는 노동을 주문하며 적은 메모엔 이런 글귀가 적혀있었다. ‘야간의 주간화, 휴일의 평일화, 가정의 초토화, 라면의 상식화’… 이 메모는 차차 유명해져 일종의 밈(meme)으로 치환되었는데, 사실 나는 정말이지 요만큼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방송업계에서는 이미 ‘야간의 주간화’가 만연했으니까.


방송작가 노동 환경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드라마 스태프들의 밤샘노동 이슈다. 이한솔의 책 <가장 보통의 드라마> 속에는 이런 실화가 나온다. 시청률이 꽤 잘 나오던 한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한빛미디어 노동인권센터로 제보가 들어왔다. 제보 내용은 이랬다. 일주일에 6일을, 하루에 21시간씩 촬영했다는 거다. 이게 사람이 할 수 있는 노동량일까? 더 황당한 건 제보를 받은 인권센터에서 해당 드라마에 문제 제기를 하니, 드라마 책임자로부터 내려온 공지 내용이다.
‘21시간 일하는 것이 살인적이라 하니 하루 18시간으로 줄이겠다. 다만 주 6일 일하던 스케줄을 주 7일로 바꾼다’
결국 일주일에 일하는 시간은 동일하다. 조삼모사인 셈이다. TV에 아침마다 생방송으로 나오는 정보성 프로그램들의 노동량도 과중하기로 유명하다. 이런 프로그램에 일하는 작가, 스태프들은 일주일에 최소 한 번 이상 밤샘노동을 한다. 공중파든 케이블이든 밤샘노동을 하는 방송작가와 PD는 내 주변에도 너무 흔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TV 프로그램 작가 구인공고에서는 요새 ‘밤샘’이라는 단어가 자주 쓰인다. 밤샘이 있어서 표시되는 게 아니다. 구직하는 방송작가들을 유혹하기 위해 쓰인다. ‘밤샘 근무 없는 편’, ‘일요일만 밤샘이 있음’, ‘일주일에 한 번만 밤샘합니다’… 대체 어떤 업계에서 밤샘이 없거나 적다는 걸 광고한단 말인가. 밤샘 노동이 너무 만연하니 일어나는 기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최저시급 보장합니다
지난해 방송작가들과 한자리에 모여 얘길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곳에서 들었던 얘기들이 내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특히 “야근하고 밤 11시, 12시에 퇴근하면 집에 갈 택시비가 없다”라는 신입 작가들의 고백이 그랬다. 이런 저임금 문제는 지역 방송사일수록 두드러진다. 지역 방송사의 경우 작가 처우와 관련된 내규가 없거나 20~30년 전 수준의 비인간적인 급여가 책정된 곳들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지역에는 매일을 정규직 노동자처럼 출근하고도 80만 원, 90만 원의 급여를 받는 작가들이 있다. 그렇다 보니 신입 작가를 구하는 프로그램들은 구인공고로 자랑을 한다. ‘최저 시급 보장’이라고.


최저 시급은 국가가 임금 결정 과정에 개입해서 정한 최저 수준의 임금이다. 법으로 강제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1인 이상 근로자를 사용하는 모든 사업장에서 지켜야 한다. 최저 시급 지키는 게 무슨 자랑이냐고? 방송가는 그 어려운 걸 해낸다. 신입 작가에게 우리는 최저 시급에 준하는 급여를 준다고, 적어도 당신의 노동력을 과하게 착복하지는 않는다고 공고에 당당하게 써 놓는다. 그나마 ‘최저 시급 보장’이 쓰인 공고가 낫다고 해야 할까. 최저 시급 보장이 적히지 않은 공고는 급여 하한선마저 지키지 않았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4. 페이 밀리지 않습니다
방송가 구인공고에서 가장 흔한 표현 가운데 하나가 ‘페이 밀리지 않는다’는 문구다. 이런 말은 주로 외주 제작사에서 작가를 구할 때 쓰인다. 외주 제작이란 방송사로부터 주문을 받은 제작사가 방송을 만들고 원청인 방송사에 제공하는 형태를 의미한다.
문제는 이런 외주 제작사들에서 임금 체불이 흔하게 일어난다는 데 있다. 작가들의 급여가 밀리는 건 그나마 나은 편이고, ‘사정이 어렵다’며 이런저런 이유를 대다 결국 급여를 끝까지 주지 않고 대표가 잠적해버리는 경우도 흔하다. 이런 상황이 오면 원청업체인 방송사는 “우리는 모르는 일”이라고 선을 긋는다. 결국 제작사에서 일한 인력들만 고스란히 피해를 떠안는 상황이 되는 거다. 오죽하면 방송작가들은 자체적으로 상습 급여 체불 업체를 공유하기도 한다. 원청인 방송사도, 하청인 제작사도 작가들과 대척점에 서니, 결국 개인에 불과한 작가들이 다른 개인 작가를 돕는 수밖에 없다. 이제 외주 제작사들은 작가들의 조직적 움직임을 감지하고, 구인 공고를 올릴 때 ‘절대 페이가 밀리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인다.
방송사의 작가 구인공고를 보다 보면 오싹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공고를 읽다가 ‘일주일에 1~2일만 밤샘합니다’라는 친절한 문장과 눈이 마주치면 그 어떤 서스펜스 드라마보다 가슴이 서늘하다. 그런 공고를 보고 나면 마음이 단단해진다. 방송이라는 세계에 대해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떠들 것을 결심한다. 나는 방송가의 구인공고가 더는 공포물이나 서스펜스 추리물이 아니기를 바란다. 내가 몸담은 업계의 환경을 말할 때 민망하거나 부끄럽지 않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사람을 갈아서 방송을 만드는 시스템이 이제는 바뀌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 오늘도 묻는다. 당신의 방송은 안녕한가요?
이은혜
방송작가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 TV 뉴스,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에서 일했다. 방송하며 자라난 질문들을 품고 살다가 2021년 7월에 <쓰지 못한 단 하나의 오프닝>이라는 책을 냈다. 세상에 라디오와 밤이 존재하는 한 낭만은 영원하다고 믿는다. https://brunch.co.kr/@graceful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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