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쯤 전의 일이다. 당시 라디오 작가였던 나는 아는 작가의 초대로 유명한 TV 프로그램 촬영 현장에 구경삼아 견학을 가게 되었다. 대형 방송사에 발을 들인 것이 처음이었는데,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방송사의 엄청난 규모나 그 건물에 달린 수백 장의 반질거리는 통유리창 때문이 아니었다. 나를 놀라게 했던 건 사람들의 ‘막내 타령’이었다. 현장 여기저기서 다급하게 ‘막내’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막내야!” “막내 지금 어디 있대?” “막내 얼른 불러와!”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가 막내인 거지?’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앳된 단발머리의 20대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바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PD나 작가들이 시도때도 없이 부르는 ‘막내’였다. 단발의 그녀는 종종거리며 바쁘게 촬영 현장 곳곳을 누볐다. 하도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부르니 잽싸게 움직여야 하는 것 같았다. 그날의 기억은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막내 피디’, ‘막내 아나운서’는 없다
방송업계에서 신입 작가들을 부르는 호칭은 정말이지 기상천외한데, 몇 가지 대표적인 것만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1. 막내: 당신은 내 혈연이 아닙니다. 2. 자료조사: 자료조사는 사람에게 쓰는 호칭이 아닙니다. 3. 신입: 차라리 무난. 4. 아가: 돌잡이는 수십 년 전에 마쳤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흔하게 쓰이는 호칭은 ‘막내’다. ‘막내 작가’도 아니다. 작가라는 두 글자는 떨어져 나가고, ‘막내’만 덩그러니 남는다. 장녀도, 장남도 일단 방송사 신입 작가가 되면 그 즉시 막내가 될 수 있다. 같은 신입 사원이어도 PD나 아나운서에게는 ‘막내 PD’ 라거나 ‘막내 아나운서’라는 말이 잘 쓰이지 않는다. 유독 신입 작가들만 ‘막내’라는 서열적 호칭으로 불린다. 동일한 프로그램 안에서, 각자의 담당 업무가 명확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막내’는 작가여야만 했다. 기묘한 일이다.


스스로 ‘잡가’라고 부르는 신입 작가들
일하는 사이에서 호칭은 중요하다. 예의의 문제가 아니다. 호칭에는 구성원들이 그 사람을 어떻게 인식하는지가 투영된다. “이은혜 작가, 담배 한 갑만 사다주시겠어요?”는 어렵지만 “막내야, 담배 한 갑만 사다 줘”라는 말은 전혀 어렵지 않다. 호칭만 바꾸면 업무 외의 일을 타인에게 지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방송가에서 일명 막내, 신입 작가들의 업무는 대단히 광범위하고 잡다하기로 유명하다. 원고의 중요한 부분을 맡는 것은 대부분 메인 혹은 서브 작가이며, 그 외의 모든 잔 업무는 신입 작가의 몫이다. 방송사에 따라 신입 작가들도 본래의 업무인 글쓰기를 할 수 있는 곳도 있지만, 여전히 많은 방송사의 신입 작가들은 원고 참여는커녕 전화 돌리기, 세탁물 처리하기 같은 일들을 떠안고 산다. 선배들의 선의와 양심에 기대 나의 커리어가 좌지우지되는 셈이다.
아래는 지난 2019년 10월 21일 고용노동부 국정감사에서 나온 신입 방송 작가 A 씨의 증언이다.
“오전 10시 출근해서 퇴근하면 밤 12시, 일찍 가면 11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방송 맡은 주에는 토요일까지 주 6일 상근으로 일한다. 재택근무는 한 번도 해본 적 없고 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다. 정산, 비품을 사거나 결재받는 일, 방문객 등록, 주차 할인 업무까지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신입 작가들은 스스로를 작가가 아닌 ‘잡가’라고 부른다. 잡무가 하도 많아서다. 출연자 섭외, 취재, 스케줄 정리, 원고 수합, 녹취록 타이핑, 영상 찾기, 출연자 급여 정산, 공문 요청과 발송, 주차 할인, 비품 구매, 커피와 담배 심부름까지. ‘막내’라는 애정 어린 말을 빌어 방송가에서 신입 작가들에게 전하는 것은 비전문적인 업무와 과로뿐이다.


요즘 방송가에는 “막내 구하기 힘들다”, “이젠 막내를 뽑는 게 아니라 모셔오는 것 같다”는 말들이 떠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뭐랄까, ‘그걸 이제야 알았단 말인가’ 하는 착잡한 기분이 든다. 이제 사람들에게 일방적인 노력을 강요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아무리 방송을 좋아한다고 해도 불공정한 업무 방식과 처우를 기꺼이 참아주는 사람은 없다.
이제 막내들에게 이름을 돌려줄 때다. “막내야”라는 말 대신 “박OO 작가”로. 호칭이 진보하면 생각도, 태도도 자연스레 함께 진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의 업무가 존중된다면 신입 작가들이 매번 방송 현장에서 증발하는 일, 그래서 선배들이 망연하게 새로운 막내를 급하게 찾아 헤매는 일은 사라질 것이다.
이은혜
방송작가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 TV 뉴스,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에서 일했다. 방송하며 자라난 질문들을 품고 살다가 2021년 7월에 <쓰지 못한 단 하나의 오프닝>이라는 책을 냈다. 세상에 라디오와 밤이 존재하는 한 낭만은 영원하다고 믿는다. https://brunch.co.kr/@graceful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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