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리콘밸리의 반도체 기업 사에서 4년째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한국의 한 대기업에서 11년간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유학이나 외국계 기업 근무 경험도 없는 채 바로 미국으로 이직했기에 양국의 기업문화 차이는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나 역시 여전히 이곳에 적응 중이지만, 나에게 새로웠던 실리콘밸리의 기업 문화를 소개함으로써 한국 독자들이 자신이 속한 기업의 문화를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연재를 시작한다.
전면 재택, 사무실을 그리워하는 ‘프로 재택러’들
사실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개발자나 연구원들에게 재택근무(WFH: Work From Home)는 새로운 제도가 아니다. 코로나19 이전에도 회사는 직원들의 생산성을 위해 유연하고 탄력적인 근무환경을 제공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동료들은 출퇴근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일주일의 절반은 재택, 절반은 출근하는 식의 하이브리드 재택을 이전부터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으로 재택근무를 하는 것과 강제로 재택근무를 하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나는 작년 1월 이후 동료들과 직접 대면한 적이 없다. 내가 있는 R&D 직군은 혼자 일하는 시간이 많은 편이긴 하지만, 동료들과 업무 진척을 공유하거나 아이디어를 나누는 시간도 적지 않다. 과거에는 코딩 중 예기치 못한 버그가 발견되었을 때 옆자리 동료에게 즉시 도움을 받았고, 좋은 아이디어가 갑자기 떠오르면 동료들과 화이트보드 앞에 모여 그림을 그려가며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곤 했다. 이제는 그 모든 것을 원격 회의로 진행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커뮤니케이션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아쉬운 것은 점심이나 티타임 등 동료들과의 업무 외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코로나19 이전에는 함께 식사를 하며 가족, 일상, 타 부서, 회사 분위기, 업계 트렌드 등 회의에서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눴는데, 한국 같은 회식문화가 없는 미국에서 동료들과 자연스럽게 라포(Rapport: 친밀도, 신뢰관계)를 형성하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코로나19 이후 이같은 아쉬움을 호소하는 팀원들이 많자 우리 팀 매니저는 화상으로 함께 식사하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가상 점심(Virtual Lunch) 시간을 만들었지만, 매일 하기도 어렵고 효과도 미미했다. 무엇보다도 음식을 먹는 장면을 동료들에게 스트리밍하는 것이 다소 부담스러웠는지 다들 빈손으로 카메라 앞에 나타났고, 결국 가볍게 수다를 떠는 또 다른 화상 회의가 되어 버렸다.
포스트 코로나를 준비하는 실리콘밸리
“앞으로 당신이 원하는 근무형태는 다음 중 어떤 것인가요? 1) On-site(사무실 근무), 2) Fully Remote(영구 재택근무), 3) Hybrid(사무실과 재택근무 절충)”
지난달 우리 회사는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팬데믹 이후 근무방식에 대한 선호도 조사를 실시했다. 실리콘밸리가 있는 캘리포니아주의 백신 접종율은 53%를 돌파했고, 머지 않아 이 상황이 끝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설문 결과 80% 이상의 직원들이 사무실과 재택근무를 절충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 모델을 선택했다. 2년 가까이 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피로감이 쌓여가지만, 이미 익숙해진 재택근무의 장점 역시 포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를 포함한 실리콘밸리의 주요 테크 기업들의 주된 고민은 ‘어떻게 하면 팬데믹 이후 직원들에게 효율적 근무환경을 제공할 수 있을까’가 됐다. 재택이 일상화되며 직원들의 생활양식과 회사의 운영 방식은 과거로 돌릴 수 없을 만큼 바뀌었기 때문이다. 회사마다 다르겠지만 우리처럼 직원들의 선호도를 수렴하여 탄력적으로 운영하려는 회사가 많다.


직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근무 형태가 세분화되면서 회사의 업무 공간도 자연스럽게 재편되고 있다. 개인 지정 좌석은 사무실 근무자에게만 제공되고, 나머지 좌석은 하이브리드 근무자들이 사용하는 공용 좌석으로 변모했다. 또 하이브리드 근무자들은 각자가 사용 가능한 연간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재택근무를 하면 된다.
또 우리 회사의 경우 코로나19 이전과 달리 ‘영구 재택근무’를 선택할 수 있게 됐다. 이는 팬데믹 기간 동안 재택근무를 하면서도 업무 공백 없이 생산성을 유지하고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결과다. 우리 회사뿐 아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트위터가 최초로 신청자에 한해 영구 재택근무를 허용했다. 트위터는 만성적자에 시달리다 코로나19 시기에 극적으로 흑자 전환에 성공한 회사다. 이외에도 페이스북,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스퀘어, 쇼피파이 등 크고 작은 테크 회사에서 영구 재택근무 옵션을 공식 발표했다.
Work From Home? Work From Anywhere!
영구 재택근무 이후 직원들의 삶은 많이 달라졌다. 직원들은 더 이상 회사에서 출퇴근 가능한 거리에 거주할 필요가 없다. 우리 회사가 위치한 산호세 지역은 연봉이 높다는 엔지니어들도 남는 돈이 별로 없다고 투덜댈 만큼 물가가 비싼 것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내 주변에도 LA, 남부 캘리포니아, 혹은 다른 주로 이미 이주한 지인들이 상당수 있다. 영구 재택으로 연봉이 삭감 되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주로 절감한 월세나 세금이 연봉 삭감폭 이상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특정 공간과 시간에 묶이지 않는 자유로움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영구 재택근무는 채용 방식도 바꿨다. 과거 미국 이외 국가에서 입사하는 사람들은 입사 조건에 따라 반드시 미국으로 이주해야 했다. 따라서 자국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 지원자의 경우 실력이 아무리 우수해도 채용에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구 재택 옵션이 생긴 현재는 지원자가 미국과 원격 회의를 진행하는 데 무리가 없는 시간대 국가에 거주하는 한 미국으로 이주할 필요가 없어졌다. 인력 수급에 경쟁적인 실리콘밸리의 기업들은 향후 세계 각지의 인재들을 채용하기 위해 이러한 이점을 십분 활용할 것이다. 즉, 실리콘밸리는 재택근무(WFH)를 넘어 세계 어디서나 근무할 수 있는(WFA: Work-From-Anywhere) 모델로 진화하고 있다.
근무 형태의 본질은 평가 방식
실리콘밸리가 팬데믹 이후를 대비해 영구 재택 등 전향적 변화를 추진할 수 있는 것은 일의 과정보다 결과로 평가하는 그간의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목표는 함께 세우되 그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은 개인의 자율에 맡기는 것. 회사 업무가 직원의 경력을 성장시킨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낄 때 직원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모든 자원을 업무에 쏟는다는 것을 이곳 기업들은 일찍이 깨달았다. 코로나19로 인한 재택근무 전환은 이를 더 명확하게 증명했을 뿐이다.
포스트 코로나를 준비하는 한국 역시 과거로의 회귀와 새로운 미래 사이에서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이처럼 중요한 시점에 한국에서도 영구 재택근무 제도를 발표한 네이버 등 제도 개편에 나선 기업들의 소식이 들려 반가웠다. 앞으로는 이같은 한국 기업들의 소식을 더 많이 들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원종
Intel Reasearch Scientist
삼성종합기술원에서 11년간 근무 후, 현재 미국 산타클라라 소재 인텔에서 Research Scientist로 4년째 그래픽스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삼성에서 재구성 가능 프로세서, GPU 개발에 참여했고, Ray Tracing H/W 팀을 이끌었다. 실리콘밸리에서의 경험담을 브런치에 연재 중이다. https://brunch.co.kr/@airt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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