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 있었던 일이다. 그리 큰 규모의 프로젝트는 아니어서 새로 들어온 경력 디자이너 A와 들어온 지 2년 정도 된 주니어 디자이너 B가 같이 일할 수 있도록 팀을 꾸려주고, 나는 주기적으로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점검했다. 내가 직접 디자인하는 일은 아니었고 이들이 디자인을 잘 진행하고 프로젝트를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매니저로서 내 역할이었다
나는 문제 발견, 컨셉 도출, 디자인 진행, 의사결정까지 그들의 손에 맡겨볼 심산이었는데, 둘이 함께 작업을 해나가면서 협업(Collaboration)에 관해서도 서로가 좀 더 능숙해지기를 원했다. 내심 새로 들어온 경력 디자이너인 A가 B를 데리고 프로젝트를 잘 이끌어주기를 바랬다.


A는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지만 경력직이어서 그런지 책임감 있게 일을 진행할 줄 알았다. 작업의 결과물도 좋았고, 무엇보다 일을 적극적으로 이끌어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A는 B와 같이 일하는 것이 힘들다고 나에게 이따금씩 하소연을 해왔다. 이유인즉슨, B의 프로젝트 기여도가 너무 낮고, 회의를 하거나 의사결정을 할 때 사사건건 딴지를 건다는 이유였다. A의 말만 들어보면 B의 잘못이 너무 명백했지만, 매니저인 나는 그래도 B의 의견도 들어봐야 했다.
B와의 1:1 미팅에 들어가자, B 역시 A를 향한 불만이 많았다. B의 불만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A가 여러 가지 결정을 하는데 자기 의견은 묻지도 않고 본인 마음대로 해버린다는 것이었다. 몇 번인가 그런 일이 반복되자 B도 본인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맘에 안 드는 결정들에 대해서는 A에게 반복적으로 ‘딴지’를 걸게 되었다고 한다. 의사결정 방향에 동의할 수 없으니 프로젝트의 기여도도 자연스레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프로젝트의 마지막에는 결국 A와 B가 갈라져서 A 혼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마무리하게 되었다. 프로젝트의 결과와는 별개로 협업의 차원에서는 실패한 프로젝트가 되어버렸다. 이 일로 인해서 제3자 입장에서 둘 다 지켜본 나 또한 올바른 협업, 효과적이고 생산적인 협업에 관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협업에 대한 흔한 오해
협업(協業)이라는 단어는 그대로 해석하자면 ‘화합할 (협), 일 (업)’으로 구성된 단어이다. 즉 여러 사람이나 여러 조직이 함께 화합해서 일을 한다는 의미다. 협업에는 여러 방식이 있다. 서로 다른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협력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협업이고, 단순한 일을 여러 명이 나누어 짧은 시간 안에 효율적으로 끝내는 것도 협업이다. 단순한 것 같지만,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A와 B의 협업은 좋지 않게 마무리된 것 같다.
A가 오해한 협업
경력직이었던 A는 전문성이 있었고, 프로젝트를 어떻게 추진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도도 높았다. 다만 일을 진행하는 방향을 설정할 때 B에게 의견을 묻지 않았던 것, 그리고 혼자서 결정한 방향을 B에게 통보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 문제였다. 물론 A는 매니저인 나에게는 프로젝트의 방향과 예상되는 효과 및 문제점들을 미리 알려왔다. 보고받는 나의 입장에서는 편했지만, 그의 의견이 A와 B가 함께 고민했던 내용이 아닌 A만의 생각이었다는 것은 뒤늦게 알았다. A는 본인보다 경험도 적고 스킬 레벨이 낮은 B가 프로젝트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파트너인 B를 단지 일이 많을 때 자신의 일손을 덜어주는 조력자 정도로 생각한 것 같았다.
B가 오해한 협업
B 역시 개선할 점이 있었다. B는 경험이 적고 기술 수준은 낮았지만 디자이너로서 높은 열정이 있었다. 그래서 디자인 업무뿐 아니라 디자인에 영향을 미치는 전략 등에도 본인의 의견을 관철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 넘치는 열정으로 여기저기 필요 이상으로 신경 쓰며 미팅을 하고 다니느라, 본인의 주 업무인 디자인 업무는 소홀히 하게 됐다. 결과 역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A에 비해 초라한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엄청난 속도와 양, 그리고 높은 질까지 보여주는 A 덕분에 B의 퍼포먼스는 미미하게 보였다.


모든 과정에 모두가 참여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같이 하는 것이 협업이 아니다. 협업이란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전문성을 레버리지(Leverage: 지렛대 작용의 원리처럼 적은 힘으로 최대한 이용해서 팀 단위에서 함께 성과를 내는 것) 하는 것이다. 가령 엔지니어 관련 지식이 전무한 내가 개발자의 의견에 전적으로 신뢰를 보내는 것처럼, 같은 디자이너라도 B는 A가 가진 전문성과 경험을 존중해야 했다. A가 결정하는 프로젝트의 전략이나 방향에 신경을 쓰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하기보다, 본인의 주 업무인 디자인을 통해서 역량을 스스로 증명하고 보여줬어야 했다.
Win-Win 하는 콜라보레이션의 3가지 조건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여러 가지 다양한 역할의 사람들(디자이너, 개발자, PM, 리서쳐 등)이 함께 일하게 된다. 위와 같은 경험을 거치며 내가 깨달은 협업에 꼭 필요한 세 가지 조건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봤다.
1. 프로젝트 목표의 명확한 공유 (Goal shared clearly)
프로젝트의 목표가 명확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목표가 팀 멤버들과 명확하게 공유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는 반드시 프로젝트의 목적과 함께 프로젝트의 성패 여부를 어떻게 측량할지 구체적인 방법도 제시되어야 한다. 이는 구성원들이 각자의 업무에 임할 때 업무의 중요도, 긴급성, 투여 시간을 결정할 수 있게 돕는 요인이다. 구성원들 사이에서 자원 할당량의 균형이 맞지 않으면 팀원 간 필요 이상의 갈등이 생기기 쉽다. 나아가야 할 정확한 방향과 속도를 맞추기 위해서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우선순위를 미리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2. 안전한 울타리 조성 (Provide a Safe Place)
팀은 구성원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의견을 공유하는 곳이다. 때문에 다양한 의견을 내기 안전한 곳이 되어야 한다. 어떤 의견이라도 충분한 이유 없이 쓰레기통에 버려지거나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직급과 경험에 관계없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기회가 동등하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자유로운 의견 개진이 가능한 분위기와 문화가 팀에 조성되어야 한다. 이는 프로젝트 시작 시에 전체 리더가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다.
3. 전문성을 인정하고 존중하기 (Leverage Expertise)
모든 사람들이 의견을 동등하게 낼 수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의사 결정권을 갖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물론 의사 결정 과정에는 모두가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몇 가지의 안을 두고 첨예한 대립이 있거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는 분야에 어떤 한 사람이 전문성을 지니고 있을 경우에는 전문가의 의견이 우선되어야 한다. 이는 의사 결정권자가 모든 의견을 동등하게 검토했음을 전제로 하며, 특정 전문가가 결정에 많은 책임을 지게 되므로 리더가 이 같은 방식을 선택할 때는 신중할 것을 권한다.
박세환
Design Manager, Lead
현재 실리콘밸리에 있는 eBay에서 Payment Design Team의 Design Manager 및 Lead를 겸하고 있다. 이 전에는 SAP, 삼성전자에서 근무했으며, B2B 및 B2C, 그리고 design system, eCommerce, payment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디자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https://brunch.co.kr/@parkisthin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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