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 게임에서 e스포츠가 시범 종목으로 채택될 만큼 게임은 하나의 문화이자 스포츠가 됐다. 그 중 라이엇게임즈가 만든 <리그 오브 레전드(LoL)>의 한국 리그인 LCK는 게임계의 EPL로 불린다. 전 세계 ‘겜덕’들이 잠을 포기해가며 한국 현지 시간에 맞춰 경기를 실시간으로 시청하기 때문이다. 전 세계를 열광케 한 e스포츠를 만든 세 사람을 만났다.
진달래 공간 디자이너
라이엇게임즈 한국 오피스 공간 디자인을 맡았다. 롤 파크 공용 공간의 휴지통부터 LCK 경기 무대와 스튜디오까지 그녀의 손을 거쳤다. 사옥과 롤 파크 공간 변경 이슈에 대응해 제안 및 공사를 진행하고, 그 밖에 팝업 스토어나 이벤트를 기획할 때 공간 활용을 검토하고 컨설팅한다.


Q. 지금까지의 커리어는?
공간 디자이너로 라이엇게임즈가 다섯 번째 직장이다. 인테리어 회사에서 오피스 공간 설계로 시작해, 네이버 SPX팀에서 ‘그린팩토리’ 사옥 프로젝트, LG서브원 FM 사업부에서 오피스 공간 컨설팅, NHN엔터테인먼트에서 데이터센터와 주차타워 건축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2017년 라이엇게임즈에 합류해 사옥 이전 프로젝트와 롤 파크 구축 프로젝트의 공간 디자인 디렉팅을 담당했다.
Q. 라이엇게임즈만의 독특한 문화가 있나?
라이엇게임즈는 동료끼리 ‘default to trust’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본인이 맡은 일은 책임감을 가지고 해 낸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업무 시간에도 게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분위기다. 무제한 유급 휴가 제도도 마찬가지다. 일할 때 확실히 맡은 바 책임을 다한다면, 회사는 믿고 지원한다.
이런 신뢰는 직원들이 맡은 업무에 대해 주인 의식과 책임감을 갖고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가끔 주위에서 게임 회사에 다니면 게임 많이 하냐는 질문을 자주 하는데, 직원 모두 게임을 많이 한다. 라이엇게임즈는 <리그 오브 레전드>(이하 LoL)와 게임을 사랑하는 ‘게이머’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 난 그런 동료들을 위해 사내에 롤방과 PC방을 만들었다. 일할 때는 업무에 집중하고 게임할 때는 게임에 집중할 수 있도록.
Q. LA 본사에도 ‘라이엇’ PC방이 있다고
한국 PC방 특유의 먹거리 문화가 외국인들 눈에는 신기하고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 같다. 실제로 라이엇게임즈의 CEO 마크 메릴이 LA 한인타운에서 PC방 문화를 접하고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리스펙트’ 차원에서 LA 본사에 PC방을 만들기도 했다. 라이엇 PC방은 LA 본사에 있는 1호점을 제외하면 전 세계에 서울 롤 파크 2호점이 유일하고, 2호점은 일반인도 이용할 수 있다. 특히 PC방 스낵 메뉴는 종각 맛집으로도 소문이 날 정도로 ‘퀄리티’가 높다.
세계 최고의 게임 회사가 직접 운영하는 PC방다운 시설도 갖췄다. 게임하기에 최적화된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모니터와의 거리 조절이 유연하도록 모니터암을 설치한 것은 물론이고 뒷자리와의 여유 공간, 편한 의자, 게임에 집중할 수 있는 주변 환경(조도), 고사양 컴퓨터 및 주변 기기 등을 세심하게 고민했다.
Q. 게임을 직관할 수 있는 아레나를 설계할 때 고려한 부분은 뭔가?
롤 파크는 LCK 시즌 경기를 위한 복합 문화 시설이다. 400석 규모의 전용 경기장을 비롯해 카페, 전시 공간, 팬미팅 공간, 굿즈를 판매하는 라이엇 스토어가 마련돼 있다. 직원들을 위한 업무 공간과 스튜디오, 선수 대기실 등도 있다.
롤 파크 LCK 아레나는 360도 원형 구조와 개방된 선수석으로 설계했다. 방송 위주로 만들었던 계단식 극장형 구조에서 탈피한 것. 선수석과 관람석의 거리를 좁혔기 때문에 관객이 선수들의 섬세한 손 움직임과 미세한 표정 변화, 긴박한 순간의 팀워크 등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 원형 구조는 관객들이 서로의 존재를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어 응원 문화와 연대감을 심어줬다. 개인과 가상공간에 한정되기 쉬운 e스포츠 특유의 팬 문화를 현실 공간으로 확장시킨 것. 롤 파크의 임대 계약이 12년인데, 해마다 차곡차곡 스토리가 쌓이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내 역할이자 숙제다.
Q. 롤 파크는 종각역 그랑서울 내에 있다. 임대료 포함 1천억이 넘는 예산을 들였는데, 굳이 이렇게 비싼 지역에 개장한 이유는?
편리한 교통과 접근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했다. 직관하러 오는 플레이어의 대부분은 중·고등학생이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경기장이 크고 볼거리, 누릴 거리가 많더라도 교통이 불편하면 찾기 어렵다. 경기가 늦어지면 밤 12시 넘어 끝날 때도 있는데, 교통편이 없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롤 파크를 종각에 마련한 가장 큰 이유는 팬들이다.
진예원 글로벌 프로듀서
LCK의 영어 중계와 콘텐츠 제작을 담당하고 있다. 글로벌 규모의 경기 진행 시 현장과 커뮤니케이션하며 제작 과정을 조율하는 업무도 수행한다.


Q. 게임 회사에서 일하게 된 계기는 뭔가?
원래는 영화와 TV 연출을 전공했다. 대학원에서 ‘게임 연구’ 분야를 접했는데, 마침 <아이온>이라는 게임을 하며 큰 레기온(길드)의 백부장(부길드장)을 맡고 있던 시기였다. 게임 회사에 가면 게임을 플레이할 뿐만 아니라 연구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매력을 느꼈다. 엔씨소프트를 거쳐 라이엇게임즈에 합류했다.
Q. 프로 게이머 ‘페이커’의 추정 연봉이 50억이다. 한국 스포츠계를 통틀어 가장 높은 대우인데.
한국의 LCK가 축구로 치면 영국의 EPL과 비슷한 위상이다. 국내 어느 프로 스포츠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재밌는 현상인데, 한국보다 해외 시청자 비중이 높다. 2019 LCK 스프링 서머 결승전은 전 세계 약 2백92만 명이 시청했다. 주 시청자는 북미와 유럽 팬이 많은데, LCK 중계 시간이 현지 시각으로 늦은 밤에서 새벽 시간임에도 LCK를 본다. 한국 e스포츠의 인기는 <스타크래프트> 시절에 이미 프로야구의 열기를 뛰어넘었다.
2004년, 스타 경기를 보기 위해 10만 관중이 몰린 ‘광안리 대첩’ 같은 역사적인 사건은 아직도 회자된다. 같은 날 사직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올스타전 관중인 1만5천 명을 훨씬 넘는 규모였다. 한 해외 학술 논문에는 한국이 ‘택시 아저씨도 <스타크래프트>를 하는 나라’로 묘사됐다. 한국 사람이 게임을 잘한다는 인식 때문에 ‘한국 서버 실버는 북미 서버 골드’라는 농담도 있다. 한국 선수들이 좋은 플레이를 할 때 하나같이 “나이스~”라고 하는데, 이를 본 외국 프로 선수들이 ‘nice’를 한국 발음으로 “NAISUUU~”라고 외치기도 한다.
Q. 한국 유저들만의 특징이 있나?
채팅 내용이 다르다. 해외 유저는 주로 이모티콘이나 짧은 은어로 감정을 많이 표현하는 반면, 한국 유저는 언어유희와 ‘드립력’이 탁월하다. 고시조로 라임을 맞추던 민족의 후예라 그런지, 감탄을 금치 못하는 기발한 표현이 채팅창에 난무하다. 팀 플레이할 때, 잘하는 사람에게 묻어가며 승리하는 사람을 두고 ‘버스 탄다’고 묘사하는 식이다.
Q. 유저가 전세계에 있는데, 프로듀서는 어떤 일을 하나?
외국 시청자에게 한국 게임 문화가 정말 흥미롭다는 인상을 주려고 한다. 그들이 LCK를 친근하게 느낄 수 있도록 게임 커뮤니티에 올라온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노력한다. 디시인사이드, 인벤, 옵지, Pgr21, Reddit 등 게임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글들을 놓치지 않고 챙겨 본다. 나 역시 오랜 게이머로서 골수 하드코어 팬분들의 생각이 가장 궁금하기도 하지만, 결국 게임 문화를 이끄는 건 그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튜브와 트위치 영상은 물론 선수·팀·중계진의 실시간 트윗을 읽으면서 오늘 게임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반응을 살핀다.
정지혜 e스포츠 방송행정
LCK의 제작 및 중계를 담당한다. 방송 제작 과정에 필요한 모든 협업에 대한 계약 진행 및 계약 내용에 대한 협의, 그리고 이후 발생하는 모든 재무적인 사항 등 방송 제작 관련 행정&재무 영역을 총괄한다.


Q. 지금까지의 커리어는?
첫 직장은 증권사였는데 보수적인 분위기가 맞지 않았다. 막연히 게임 회사라면 좀 더 자유롭고 즐겁게 일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넷마블에 지원했고, 3년간 고스톱 포커 사업부에서 어뷰징 플레이어 조치에 대한 감사 업무를 맡았다. LOL은 북미 서버에서 서비스되고 있을 때 접했다. 친구들과 함께 플레이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하면 할수록 빠져들었고, 30레벨을 달성할 때쯤 한국에서 서비스를 시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라이엇게임즈에 합류했다.
Q. 게임에 관한 특별한 복지가 있을 것 같은데
가장 좋아하는 사내 문화는 ‘사토’라고 불리는 사내 토너먼트 이벤트다. 사내 최강 팀을 가리는 대회인데, 팀 자체가 랜덤으로 구성되는 것이 특징이다. 평소에 접점이 없던 타 부서 직원들과 교류할 수 있어 좋다. ‘사토’는 진짜 경기처럼 결승전을 롤 파크 LCK 아레나에서 진행하고, 중계 방송도 녹화해 끝나면 전사 공유를 한다. 직원 중에 중계진 역할을 담당하는 분도 있고, 분석 데스크도 진행하며 정말 제대로 승부를 겨룬다. 주위에서 “RP(게임 내 현금) 선물 좀 줄 수 있어?” 같은 질문을 자주 받는데, 실제로 회사가 매달 일정 금액의 RP를 준다. 친구에게 선물할 수 있는 RP도 별도로 받는다. 여러 장르의 게임을 경험해보라는 취지에서 연간 2회 게임 구매 비용도 지원한다.
Q. 라이엇게임즈는 많은 사람이 궁금해하는 회사다. 직접 다녀보니 어떤가?
라이엇게임즈는 플레이어의 경험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이다. ‘Player Experience First’가 중심 가치 중 하나기도 하다. 그래서 그 어떤 게임 회사보다 게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 같다. 직원들 스스로가 플레이어라 중요한 의사 결정 과정에서 플레이어의 관점으로 먼저 생각한다.
Q. e스포츠의 인식과 위상이 변화하고 있음을 체감하나?
2018 아시안게임에 e스포츠가 시범 종목으로 채택될 만큼 e스포츠 및 게임 산업에 대한 인식이 많이 변했다. 우리가 어렸을 적엔 게임 하면 ‘공부 못하는 애들이나 하는’ 혹은 ‘엄마 몰래 하는’ 것이란 이미지가 있었지만 지금은 프로 게이머가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받는다. ‘페이커’ 같은 정상급 선수는 연봉·명예·화제성 면에서 여타 내로라하는 스포츠 스타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2013년 월드 챔피언십 결승전 관객 규모는 1만1천 명, 총 상금은 2백5만 달러였다. 5년이 지난 2018년 월드 챔피언십 결승전 유료 관객 수는 2만6천여 명, 총 상금은 6백45만 달러로 이제는 더이상 e스포츠가 그들만의 리그라 불리는 게임 대회라고 보기 어려운 규모로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2018 월드 챔피언십 결승전 무대에서 공개된 가상 걸 그룹 K/DA의 신곡 ‘POP/STARS’는 빌보드 월드 송 세일즈 차트 1위를 기록하며 세계적으로 흥행하기도 했으니까. 더욱더 많은 사람이 게임을 하나의 문화이자 놀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마치 영화를 보고 스포츠를 즐기는 것처럼 말이다.
하예진
패션 매거진 COSMOPOLITAN 에디터